닷컴 버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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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컴 버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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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등 세계 여러 국가에서 1995년과 2001년 사이에서 발생한 투기/투매 현상. 위키백과에서는 미국식 표현인 닷컴버블이라 쓰지만 한국에서 제일 많이 쓰는 표준 표현은 IT버블이다.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벤처기업이 각광받으면서 주식시장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한동안은 다신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반영구적인 활황기를 상징하던 말이기도 했으나 버블이 꺼지면서 지못미가 되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글로벌 금융 시장에 가장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 사건.

특히 후유증이 심각했던 국가로는 미국, 한국, 독일 세 나라가 있었다. 특히 미국 나스닥이나 한국 코스닥은 그나마 꾸역꾸역 소생한데 비해 독일의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 영어로 New Market)는 2003년 아예 시장과 지수자체가 없어지고 나머지 기업들도 기존 주식시장에 이전하는 방식으로 폐지되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벤처기업을 위한 주식시장인 신시장(New Market)이 따로 있었다는 것. 이 신시장에 유동성 자금이 몰려들어가면서 엄청난 버블이 불타올랐지만 결국 내려갈 주식은 내려갔다.
 
미국에서 첨단주로 인터넷/통신 관련 주가가 각광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갓 태동기를 넘어선 인터넷 산업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초유의 관심이였다. 그들은 인터넷 산업이 기존 산업을 뛰어넘어서 전부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곧이어 시작된 인터넷 사업체들은 막대한 투자자들을 끌어 모았다. 대표적으로 코즈모 닷컴, 부 닷컴, 팻츠 닷컴 등은 수많은 거액의 돈(몇백만 달러)를 모을 수 있었다. 이 회사의 대표이사들은 투자자자들에게 IT 산업의 대세로 인한 어마어마한 수입을 약속했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은 그들의 이상을 따라잡지 못했다. 아직까지 1999년의 인터넷 망은 56K 모뎀이나 케이블 선 위주였다. 당연히 인터넷 속도는 매우 느렸다. 사람들은 장미빛 미래와 웹이니깐 무언가 더 좋겠지라고 기대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너무나도 느린 서비스와 각종 문제들은 웹 서비스에 대한 불신감과 반감을 키웠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 나스닥 종합지수는 400% 상승했지만 이후 버블이 꺼지며 2001년에는 시장이 붕괴되었고, 그로 인해 투자자들은 무려 5조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닷컴기업(Dot-com company)들도 줄줄이 쓰러졌는데 웹밴(Webvan, 1999~2001)이나 빈즈닷컴(beenz.com, 1998~2001)이 그 예시이다. 2002년 10월에는 역대 최고치에서 78%나 하락했고, Cisco와 퀄컴은 주가가 86% 하락했다. 지금은 IT대기업인 아마존은 주가가 2년 동안 무려 95%가 하락했다.[3] 따라서 버블로 얻은 이득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결국 2000년 말기에는 대부분의 닷컴기업들이 스스로 파산이나 도산의 길을 선택했다. 그 중 키부 닷컴에 투자했던 투자자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수 백억 달러의 돈을 날려야 했다.

세계적으로도 닷컴 버블 현상이 있었지만 특히 한국에서는 1997년 외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가 코스닥 시장과 중소기업 위주의 벤처기업 육성책을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IT버블이 불타올랐다. 인터넷 등 IT산업이 신경제 신산업으로 각광받으면서 바이코리아 펀드, 박현주 펀드 등의 애국 마케팅 자금들까지 겹쳐져 급격한 테마주 쏠림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 코스닥 시장은 ‘주가 조작의 온상’이라는 악평과 ‘스타 CEO, 기업의 산실’이라는 호평을 동시에 받게 된다.

이 당시 IT버블로 급등한 테마주로는 골드뱅크(상장폐지), 장미디어(상장폐지), 드림라인(상장폐지), 메디슨(상장폐지. 삼성그룹에 인수되어 현 삼성메디슨), 하우리(상장폐지), 한국정보통신, 새롬기술(현 솔본),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 로커스(상장폐지), KTF(당시 한국통신프리텔, KT에 합병), KTH, SK텔레콤, 넷마블(CJ E&M에 합병 후 물적분할. 상장폐지했다가 2017년에 재상장), 한글과컴퓨터, 인터파크(현 인터파크홀딩스), 다우기술 등이 있으며, 코스닥 시장에 상장해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림의 주가가 폭등하기도 하고, 평화은행(상장폐지), 교보증권, 키움증권, 기업은행, SBS(이상 코스피시장으로 이전) 등도 주가가 폭등했었다. 당연히 IT주만 뛰었을리는 없고 벤처기업 딱지만 달고 있으면 주가가 날아다니던 시대라 유비케어[5], 비트컴퓨터 같은 의료, BT 관련주도 날아다녔다.

1999년 당시 코스닥 시장은 계속된 데이트레이딩이나 주가조작 등으로 막장 증시의 진수[6]를 보여주었으며, 당시 드림라인이나 골드뱅크의 PER은 9999배라는 희대의 전설을 남겼다. 이후 신풍제약이 PER 4000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까마득히 멀다.. 코스닥은 그나마 양반이라, 시가의 실체를 알 수 없어 오직 1:1 거래로만 해야 했던 장외주식의 버블은 더욱 심했다. 코스닥에 상장도 안 된 주식이 액면가의 200배를 찍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

허나 버블 붕괴 이후 당시 테마주들은 당연히 구대장주라고 불리다가 거의 대부분 상장폐지 당하였으며, 2015년 기준 구대장주로는 한국정보통신, 다음카카오, 인터파크홀딩스[7] 정도만 명맥을 이을 뿐이다. 주가폭등의 전설(이 기간 동안 무려 100배 가까이 뛰었다)이었던 새롬기술[8]은 추진하던 다이얼패드 사업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 뒤 투자전문회사인 솔본으로 이름이 바뀌고 실적 없는 코스닥 시장에서도 잊혀진 주식으로 전락했다. 한글과컴퓨터도 경영권 분쟁(2차 한컴사태) 등으로 사업이 침체를 겪으며 예전만한 기세는 못낸다. 그 외에도 일개 중소기업 시가총액이 현대기아차를 넘어버리거나 하는 정신나간 주가 폭등이 많았다.

외환위기 당시의 주가 최저점과 IT버블 당시의 최고점을 비교해보면 코스피:288P>1059P(2000년 1월),코스닥:60P-281P(2000년 3월)로 올랐다.그러나,주가조작 사건과 유가급등 등의 악재가 터져나오면서 2000년 마지막 날에는 코스피가 504P,코스닥은 5분의 1 토막이 난 52P로 마감했다.이후 코스닥은 100P를 다시 넘을때까지 21년이나 걸렸으며,,코스피는 5년이 더 흐른 2005년에야 1000P를 돌파한다.

그나마 이때 유입된 엄청난 자금으로 IT, BT 등 신산업들에 벤처기업들이 뛰어들어 지금의 산업 기반을 쌓는데 도움을 줬다는 시각도 있긴 하다. 신산업 격동기에 수많은 기업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건 어찌보면 필연인데 그게 유동성 자금과 겹쳐져 좀 심하게 나타났다고 보기도 한다.

2000년 당시의 코스닥 지수의 최고점은 2000년 3월 10일의 2,925였다. 이 당시의 시장 전체의 PER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최고점은 그 이후 회복이 되지 않고 있으며 회복이 요원해 보인다. 참고로 버블 당시 코스닥 기준지수는 지금의 1/10으로 낮았는데, 버블 붕괴후 지수가 30~40 수준이다보니 민망할 수준(?)이었다. 결국 2004년에 10배 뻥튀기를 하여 강제로 지수가 높은 것 처럼 보이게 만들게 되었다.
3
엔론과 월드컴 등은 분식회계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다만 미국은 벤처기업 자체에 대한 지원 정책은 폐기되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벤처 기업계인지라.. 그렇게 크라우드 펀딩 등으로 살아남아 2010년대에 다시 벤처붐이 일게 되었다.

미국은 애플, 구글, 넷플릭스, 아마존닷컴 등 IT버블 시기에 살아남은 벤처기업들이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해 나스닥 종합지수 신기록을 연일 갱신하는 등 후유증을 거의 극복한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테라노스 사건 같은게 연이어 터지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진리도 실시간으로 증명하고 있다. 가치투자

한국에서도 IT버블이 꺼지는 걸 막으려고 벤처기업가들이 정치인들에게 로비를 하는 등 부패상이 드러나 벤처기업에 안 좋은 시선이 늘어났다. 그 결과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던 벤처/중소기업 육성책이 상당수 취소되고 다시 이전 정부가 반복하던 대기업 보호정책으로 회귀하는듯한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다만 미국과 비슷하게 이때 살아남은 몇몇 벤처기업들은 지금 한국의 신산업 분야를 이끄는 대기업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네이버, 카카오, 넥슨 등이 대표적인데 광복 직후부터 이어져오던 끼리끼리 재벌 서열에 주목할만한 금이 간 몇 안되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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